서울을 떠나온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 나오려는 나는 아침밥을 먹고 가라는 누나의 권유에 또 한 번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한우가 들어간 고깃국에 밥을 든든히 먹은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한 후에야 다시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포만감과 고마운 마음, 신세를 졌다는 데에 대한 미안함과 서울부터 짊어지고 왔던 무거운 마음을 품에 안은 채 나는 버스 정거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누가 봐도 한적한 시골 마을의 길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농활을 처음 갔을 때 마을에서 걸었던 그 길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10분 정도 걸어가니 어르신들 몇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버스 정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니 서울을 떠나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아직 '개발'이라는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지방의 한적한 버스 정거장 모습이었다. 목적지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기에 나는 정거장에 도착해서야 다음 목적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버스를 기다리시는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는 혼자 여행을 왔는데 어디를 가는게 좋겠냐고 여쭈니 이구동성으로 내장산을 추천해주셨다. 아, 맞다. 내장산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구나.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내장산부터 시작된 어르신들의 지역 탐방(??) 이야기는 내장산으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선 후에야 끝날 수 있었다. 역시 어린 손자 녀석 대하듯이 알려주시고 걱정해주시는 어르신들의 인심은 따뜻했다.
버스를 타고 30여분 조금 넘게 달린 나는 드디어 내장산 국립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 계획도 준비도 없이 집에서 뛰쳐 나와 혼자 내장산에 오다니. 문득 나도 참 웃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이 부럽다거나 멋있다, 혹은 나도 혼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일 때 이야기다. 서울을 도망쳐 나온(??) 내게 여행의 설레임은 크지 않았다. 그래도 내장산이 좋긴 좋더라. 5월의 내장산은 녹음으로 가득찬, 바깥 세상과는 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내장산 국립공원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보였던 풍경이다. 녹음으로 가득찬 산 봉우리들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국립공원 입구에는 주차장과 많은 식당들, 캬바레(??) 등이 있었다. 아..국립공원 입구에 캬바레는 대체 왜 있는건데. 평일인데다가 날씨도 흐린 탓인지 등산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캬바레도 비수기(??)라 영업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오픈 싸인을 켜놓았다면 들어가서 한 곡 땡겼을텐데. 하하하하하하하. 농담이다. 개인적으로 저 캬바레 간판은 떼어버리고 싶다.
내게 시간은 많았다. 등산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을 욕심내지도 않았다. 그저 오르고 싶은 만큼 오르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보면 충분했기에 나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 경치를 즐겼다. 이리도 푸른 산이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가득 찰 것을 상상하니 역시 단풍놀이 한 번 와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국립공원인지라 흐르는 물도 맑았다. 위 사진은 아직 국립공원 입구에서 멀리 들어가지 않았을 때 찍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경치는 '산은 역시 좋구나'하는 탄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직 여행을 시작한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셀카를 찍었다. 찍어온 사진들을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사진은 없더라. 그냥 찍기 귀찮았던 것 같다. 뭐 어차피 셀카를 계속 찍어봤자 같은 얼굴에 같은 각도, 거기에 배경만 달라졌을테니 말이다.
날씨가 맑은 날은 아니었다. 옅은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둡지는 않은, 그런 날이었다. 때문에 산을 찾은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입구에 있는 식당 근처에서 사람들을 몇 보고는 한 동안은 속으로 들어가면서 사람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산 속에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물이 맑다. 산 아랫쪽이라 마실 수 있을 정도라고는 생각 않지만 그래도 몸과 마음이 지쳤던 내게 내장산의 계곡물은 한없이 맑고 깨끗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지라 공기 좋고 물 좋으니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생각나더라. 계곡물에 수박 담궈놓고, 삼겹살 구워먹으며 소주 한 잔 들이키는 맛. 그 맛이야말로 최고 아닐까. 뭐 국립공원에서 그랬다가는 당장 끌려가서 벌금을 부여받게 되겠지만 말이다. 삽겹살에 소주 생각은 뒤로 하고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당시 친구놈에게 빌렸던 디카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 보급형이었다. 그리고 수동으로 조절하는 것이 귀찮은 나머지 항상 오토로 설정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장산은 셔터를 누를 때마다 멋진 사진을 내게 선물하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카메라보다는 내 눈에 더 많은 경치를 담고 싶었다.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데로 편안하게 즐기고 싶었다. 아무 것도 신경쓰지 말고 그렇게.
내장산 입구 쪽에는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가족들과, 연인들과, 친구들과 걷기에 좋은 길이다. 하지만 혼자였던 내가 분위기 내면서 걸어봤자 아무도 내 모습을 볼 수 없지 않은가. TV 속에서야 혼자 걸으면 시청자들이 분위기 있다고 하며 쓸쓸함을 같이 느끼겠지만 말이다. 실제로는 혼자 걸으면 그런거 없다. 그냥 걷는거다. 아무도 내가 이렇게 걷는거 모른다. 그냥 마구마구 걷는거다. 터벅 터벅 터벅.
조금씩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 보다 큰 계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새 소리들로 주변은 가득차기 시작했고,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난 개인적으로 바다보다는 산이 좋다. 고소공포증이 심하기 때문에 산 정상을 오른다거나 위험한 산책로로 걷는건 싫어하지만, 그래도 바다보다는 산이 좋다.
산 속에 있으면 어딘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안정감이나 소속감이 들어서 좋다. 탁 트여진 바다에서 느끼는 해방감과는 반대되는 느낌. 내 주위에 있는 수 많은 나무들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좋기 때문에 나는 바다보다 산이 좋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혼자 있으면 '혼자'라는 느낌이 너무도 강하게 들지만, 산 속에 혼자 있으면 오히려 혼자라는 것을 조금씩 잊게 된다. 나무에 기댈 수 있고, 돌 위에 앉을 수 있고, 풀벌레나 새들이 끊임없이 울어대며 내 주위에 자기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킨다. 산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바다보다 산이 좋다. 아, 그렇다고 해서 바다가 싫다는 건 아니다. 난 바다도 좋다. 하하하하하하.
사람이 놓은 길을 따라 계속 걷다보니 비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 비석들이 왜 있었는지는 지금 기억이 안난다. 무덤은 아니었다. 아, 기억이 안난다. 비루한 대뇌활동이여.
비석들이 있던 곳을 지나가니 저만치 앞에 절이 하나 보였다. 그렇다. 내장산에 있는 내장사였다. 절이 보이자 산 입구보다는 다소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스님들도 계셨고, 그냥 여행을 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불공을 드리러 온 불교신자롭 보이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내장사를 발견한 나는 서슴없이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바람따라 국내여행 > 2009. 정읍/목포/해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내여행/영광/법성포] 쓸쓸함 안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의 추억 (6) (0) | 2011.10.06 |
---|---|
[국내여행/영광/법성포] 쓸쓸함 안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의 추억 (5) (0) | 2011.10.05 |
[국내여행/내장산/정읍] 쓸쓸함 안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의 추억 (4) (0) | 2011.10.05 |
[국내여행/내장산/정읍] 쓸쓸함 안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의 추억 (3) (0) | 2011.10.04 |
[국내여행/신태인/정읍] 쓸쓸함 안고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의 추억 (1) (0) | 2011.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