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옆으로 나있는 길은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 아닌 진짜 산길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밟고 밟아 풀이 눌리고 흙이 다져져 있는 자연스러운 산길 말이다. 숲 속은 온통 이름 모를 나무들과 풀, 꽃들로 빼곡했고, 새 지저귀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숲 속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걷는 내내 도시와는 다른 맑은 공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왜 삼림욕이 좋은건지 새삼 느꼈다. 숲이 뿜어내는맑고 시원한 공기는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저 아침부터 계속 떨어지다 말다를 반복하는 개미 눈물만큼의 빗방울 정도.
주위에는 사진에 보이는 고목처럼 기이하게 뻗은 고목들 천지였다. 이름 꽤나 나있는 산들이 대부분 그렇듯 내장산도 높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키가 큰 나무들부터 보름달이 뜨면 걸어다닐 것 같은 모습의 고목들까지 다양한 모습을 품에 안고 있었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들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 들꽃이 가득 펴있는, 작지 않은 들판이었다. 들장미 소녀 캔디가 욕 들어먹으며 뛰어다녔을 법 한 들판, 가족들과 와서 돗자리 깔고 김밥 먹은 후에 공놀이 하다가 낮잠 들기 좋은 들판, 그런 느낌이었다.
들판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던 나는 들꽃들을 뒤로 하고 다시 걸었다. 솔직히 정상 등반에 욕심이 없어 천천히 걷는 바람에 그닥 많이 올라가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날씨가 계속 궂어지는 바람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걷고 있는 상태였다.
한 20분 정도를 더 걸어갔을 때였을까, 나는 호수 위에 떠있는 정자의 그림 같은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곳이 어디일까라는 의문보다 한 장의 사진이라도 더 찍어야 된다는 압박감이 들 정도였다. 바람도 잔잔했거니와 빗방울도 잠시 멈춘 상태였다. 인기척도 없었고, 그 순간 그 곳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그냥 마구 카메라를 들이댔다. 마구 찍다보면 잘 나온 사진 몇 장은 건지겠지라는 심산이었다. 하하하하하하. 하나만 걸려라. 근데 잘 안걸리더라. ㅡㅡ;;
정자의 이름은 '우화정'. 안내판에 따르면 정자에 날개가 돋쳐 승천하였다 하여 우화정이라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붉게 물들은 단풍이 비치는 경관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는데, 5월의 우화정에서 느끼는 봄의 푸르름도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아래 사진들은 내가 우화정에서 찍었던 사진 중에 몇 장이다. 내가 사진 찍는 기술이 형편없기 때문인지, 그 날 내가 느꼈던 감동을 사진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실제로 가보면 진짜 죽이는데. 짱인데. 거짓말 아닌데. 진짜 예쁜데. 대박인데.아, 진짠데.
우화정에서의 시간을 만끽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기왕 온 김에 정상을 올라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도 많은데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그런데 한 20여분 정도 걸었을 때였을까. 갑자기 빗방울이 거세지면서 급하게 내려오는 등산객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아, 뭔데. ㅠ.ㅠ 조금만 지나면 다시 멈추겠지 하는 생각과는 달리 빗방울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으악, 으악, 으악,
결국 나는 다른 등산객들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우산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바람 불면 옷깃 여미면 되고, 비가 오면 그냥 맞으면 되니까. 어차피 혼자 하는 여행에 우산은 사치였기에 챙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대신 나름(??)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었기에 걱정거리는 없었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나는 발길을 재촉하여 내장산의 입구 즈음으로 다시 내려왔다.
오늘은 내장산에 오를 날이 아니구나 하는 마음으로 나는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속으로는 물론 젠장을 연거푸 외쳤다. 뭔가 전환점이 되어야 할 여행인데 나는 날씨 복이 지지리도 없는듯 했다. 이렇게 복 없는 날씨는 영광 법성포에서까지 이어졌다. 마이클 제길슨.
내장산 입구에서 버스를 타고 정읍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다 되었기에 오늘은 이 근처에서 머물기로 했다. 정읍역 근처에는 시외버스터미널도 있었기 때문에 내일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기에 좋을 것이라 여겼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좋은 숙소는 필요 없었다. 그저 몸 뉘일 수 있고, 씻을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시외버스터미널 근처로 가니 여관이나 모텔, 여인숙 등의 간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곳이기 때문일거다. 고민을 잠깐 한 나는 여인숙 간판이 나와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90년대 초반 TV 드라마에서 본 듯한 허름한 느낌의 여인숙이 있었다. 하루 숙박료는 2만원. 방은 사람 둘이 누우면 딱 맞을 정도의 크기였으며, 방 안에는 TV와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화장실 겸 욕실이 방 안에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내일 어디로 갈지는 내일 아침에 생각하기로 한 나는 편의점에서 사온 과자와 함께 맥주 몇 캔을 마시며 TV를 보다 잠이 들었다. 이튿날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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